쓰다듬기라는 함정과 참호
-이문석


쓰다듬기라는 함정과 참호


역사화되지 않은 시간은 늘 논쟁적이기 마련이고, 많은 당대는 난세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라,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당사자들이 느끼기에 자신들에게 마련된 즐거움의 종류는 그리 많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힘듬을 호소하면서 삶의 위로를 찾는데, 오늘날 그 위로는 쓰다듬기라는 행위에서 발견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디어만이 유일하게 주어진 실재인 듯 보이는 현실에서 쓰다듬기라는 촉각 중심의 행위가 위로라는 것은 다소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외려 그것은 미디어가 우리가 인식하는 몇 안 되는 실재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액정 재질을 쓰다듬는 정전식 터치스크린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가. 그것이 강한 감정, 그것도 강렬한 호감을 끌어내는 컨텐츠라면 말할 나위가 없다. 액정화면 너머의 대상, 특히 연예계 인물들이 제공하는 달콤한 시청각적 정보를 우리는 검지와 엄지로 만지작거리며 쓰다듬는다. 애착의 대상을 촉각과 시각 두 가지 감각의 경로로 받아들이면서, 시대의 유일한(혹은 유일하다고 여기는) 낙원 만들기인 오늘 날의 팬덤 문화는 전시의 제목대로 쓰다듬기(petting)를 위해 허용된 프레임(frame) 위에서 번뜩인다. 이때 작가가 작업의 모티프로 구한 이 작은 화면의 문화는 좋아함이라는 감정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모셔둔 온라인 신주처럼 보인다. 조금 의아한 것은, 정작 우리가 작업을 관통하는 주요한 미디어인 정전식 터치스크린을 전시장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대신 프로젝터가 투영된 스크린과 LCD 모니터 그리고 구형 CRT 모니터가 발깔개와 스팽글로 뒤덮인 쿠션 그리고 빈백(bean bag) 곁에 있다. 아마도 작가는 평소 정전식 터치스크린을 통해 덕질을 하고 또 이 덕질을 작업으로 이어갔겠지만, 작업의 프레임은 액정화면에 머물지 않고 전시장 자체가 된다. 그것은 액정화면에 집약된 시각-촉각의 쓰다듬기가 미디어 화면(시각)과 섬유소재 가구(촉각)로 이격되었기 때문이다.
왜 주제의 모티프와 구현하는 방식은 하나의 미디어, 즉 정전식 터치스크린으로 귀결되지 않았나? 주제의식의 쓰다듬기는 구현방식의 쓰다듬기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프레임을 확장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전시가 쓰다듬기의 문화로 주제와 작업으로 관통되지만, 결과적으로 쓰다듬기를 위해 허용된 프레임 안에서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결이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점을 조금 과거로 두고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임유정 작가는 <hell I made?!>와 같이 여성혐오와 같은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거나, <p의 이야기>나 <q의 이야기>처럼 자기 소외에서 벗어나려는 작업을 전개해왔지만, 탈주하려는 이들의 위치는 대개 고되기 이를 데 없는 것이기에, 그 위치에 끈적이며 달라붙은 우울과 소외를 위로하는 방향으로 주제의식을 전환한다. <glucose>(2017)에서는 ‘포도당(glucose)’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당 충전을 위한 행동’에 관련하여 운영하고, <Dang Song>(2017)에서는 공터에 있는 정자에 앉아 사람을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소일과 스마트폰 액정을 바라보는 자신의 소일을 겹쳐 놓았다. 그리고 <petting frame>의 전시에 다다라서, 사회를 바라보는 자리를 고르는 이제까지의 작업은 보드라운 깔개 위에 올라서고 그 곁에는 안락한 의자들이 주어진다. 차별만이 피부로 와닿고 개선이 피부로 와닿지 않는 사회에서, 작가가 신뢰를 잃어갈수록 작업은 마찰이 덜한 표면 위로 옮겨가는 듯 보인다. 작업의 피부는 점차 보드랍고 매끄러운 표면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두 가지 촉감이 외부에서 내부로, 즉 집으로 이동한 듯한 느낌을 준다.
문득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작업의 주제이자 작가 정체성의 일부인 여성(女)이 집(宀)으로 들어가는 이 과정, 작가의 작업이 안전을 향한 투쟁에서 시작해서 안정을 찾아 떠나는 여정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에서 글자 ‘안(安)’이 자주 발견된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안전과 안정의 의미를 가진 이 글자[安]는 아마 오래 전 여성의 활동 영역이 집 안으로 제한되었을 때 안전과 안정을 느끼는 이들로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문자 ‘안(安)’의 기획은 여성혐오적인 것이다. 임유정이 작업의 주제의식과 구현방식을 상상할 때 집 안 쪽에서 벌어지는 여가생활의 이미지들을 참고했다면, ‘안(安)’자는 일종의 함정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는 이마저도 침범당하지만) 사회가 방관하는 부조리가 차마 닿지 못하는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함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는 작가가 이번 전시에 끌고 온 ‘덕질’의 딜레마와 맞닿아 있다. 알다시피 ‘덕질’은 일본의 망가 문화와 마니아 문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오타쿠(お宅) 문화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만들어진 신조어 ‘오덕후’, ‘덕후’가 변형된 용어다. 오타쿠들과 같이 어떤 문화에 과몰입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덕질’은 연예인 팬덤 문화 내에서도 특정 대상에 강한 애착을 가지는 팬들이 스스로 사용하기도 한다. 문제는 여성은 바로 이 덕질에서도 때로 좌절하게 되는데, 남성 캐릭터에 몰입하고자 할 때, 한국 사회의 남성들 안에서 만연한 폭력이 애착하는 남성 캐릭터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전전긍긍함 때문이다. 미디어를 사이에 두고 실제 교류는 옅되 강함 감정을 투사하도록 유도하는 오늘날의 연예 산업 하에서, 여성의 덕질은 너무 많은 감정을 투여(혹은 투자)한 이가 바로 자신의 소수자성을 손쉽게 식민화하려 드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하고, 이 때문에 큰 배신감에 사로잡힌다. 이 불안함이 바로 안전-안정의 함정을 구성한다. 작가 역시 바로 이 지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전시는 그저 대책 없이 이 함정에 빠지고 마는 장인가? 전시는 자신이 당면한 고민을 그렇게 쉽게 방치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스테이트먼트의 첫 문장으로 ‘품위’를 언급한다. 우리는 이 품위라는 지점에서 덕질을 대하는 작가의 전략을 다시 생각해볼 여지를 가진다. 앞서 얘기한대로, 당대는 대개 난세이고, 특히 소수자들에게 모두 난세이며,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위로는 많지 않다. 함정이 함정임을 안다면, 품위있는 위로로 안전-안정을 도모할 수 있고, 우려를 잘 보관할 수는 있다. 우려를 보관하는 자리는 어쩌면 유일한 위로이자 어쩔 수 없는 함정으로서의 ‘안’이다. 오타쿠의 어원 중 하나가 바로 집(宅) 안에서 (주로 서브컬처 등에) 몰입하기만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안다면, 그리고 임유정의 작업이 스스로를 안녕케 하는 유일한 보금자리로 집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안다면, 우리는 두 문화적 전략의 귀착지가 집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회가 파놓은 함정을 참호로 여기기로 한 유용한 체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체념의 유용함을 공유하고자 했기 때문인지, 임유정은 관람방식에 관심을 둔다. 알겠지만, 작업의 주제는 작가의 ‘안’, 즉 집안에서의 위로로 구성되지만, 이 주제가 전시장에 들어설 경우, 관객의 입장에서는 집 밖의 행위가 되고만다. 관람자의 위치는 밖인 것이다. 작가는 함정과 참호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안(安)’ 자가 실제로 집에서나 작동될 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안’의 행위로서의 ‘덕질’이 작업으로 구현되고 전시장에 배치되었을 때, 그것은 바깥의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작가는 이 불안정한 바깥을 보다 안정적으로 구성하려했고, 집의 안쪽을 구성하는 섬유소재 가구들을 배치하여 머무는 시간을 연장시키려 했다. 이러한 방식은 동시대 미술이 미디어를 대우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른 듯 보였다. 오늘날 전시장 안의 미디어는 회화를 관람하는 방식으로 대우받는다. 필름(film)과 같이 제작된 시간을 모두 관객이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시장의 미디어는 관객이 상영의 끝과 마지막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들어와 잠시 머물다 나가는 방식이다. 임유정은 보다 오래 관객들이 작업 앞에 머물기를 바랐다. 함정 안에서 쓰다듬기를 참호 안에서 쓰다듬기로 바꾸어나가기 위해, 작가는 신체 없는 허구의 이미지에 몰두하고자 하는 주제의 모티프, 정전식 터치스크린 정보전달 방식을 전시장 안에 여러 종류의 미디어 장비와 섬유소재의 가구로 재구성한다.

‘쓰다듬기’는 작가가 주제를 정하기까지 만지작거렸던 매체, 정전식 스크린 액정화면과 전시장 안에서 주제로 작동되기 위해 공간, 미디어와 섬유소재 가구로 채워진 집 안의 풍경으로 나뉜다. 위로하는 작업을 생산하는 길과 작업이 보는 이를 위로하는 길은 쓰다듬기라는 경로 안에서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덕질을 유일한 낙원으로 두고 수행되는 쓰다듬기가 함정이기보다 참호로서 제안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글. 이문석 / 독립 큐레이터

본 리뷰는 2019 서교예술실험센터 작은예술지원사업 <소액다컴>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