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만들기(Heroine Maker)
-전소영


주인공 만들기(Heroine Maker)
2020.9.5-9.20, 중간지점(서울)에서 진행된 단체전 ‘단독주연’ 중 임유정 작가의 ‘주인공은 피곤하다'(5분, 단채널 영상, 2020)를 바탕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놀랍고 신기한 세상에서 주인공은 피곤하다
태어나자마자 바로 1살을 먹는 한국식 나이는 곧 주인공 연차를 의미한다. 신분제가 무너지고 노력하면 누구나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세상에서 사람은 어떤 조건에서도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무를 지고 태어난다. 운이 좋으면 태어난 후 몇 년 동안 독보적인 관심을 받으며 주인공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새 주인공 되기는 하나의 과제가 되어 내가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이른다.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작품이 형편없을 때, 여기서 주인공을 하느니 다른 작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는 게 더 남는 장사 같을 때, 우주의 스케일에 비하면 나라는 존재가 먼지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먼지에도 급이 있고 격이 있다는 말이 보다 더 현실적으로 와닿을 지경이다. 임유정의 ‘주인공은 피곤하다'(5분, 단채널, 2020) 속 화자는 자신의 주인공 연차에 걸맞은 고백을 이어간다.

‘물음표 백만 개'의 위기 속에서  
영상의 화자는 굳이 내가 나를 찍지 않아도 누가 나를 찍어주고 주인공으로 치켜세워주었던 시기를 지나, 셀카를 통해 세상이 요구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만 같은 위기에 직면한다. 이것이 ‘위기'인 이유는 세상이 요구하는 주인공이 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과연 그런 주인공이 되고 싶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원하는 주인공이 되려면 굉장히 위대하거나 반대로 굉장히 끔찍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검색창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참고하길 바란다) 둘 중 무엇이 되었든 플랫폼 기반의 주목 경제 시대에 매력 자본을 이용해 주인공이 되는 일은 경제적 능력으로 귀결된 지 오래다. 각종 앱을 통해 시류에 부합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주인공 되기가 비교적 수월해짐에 따라 화자의 고민은 한 번 더 꼬여버리고 만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 거라는 화자의 건강한 판단은 합리적이지만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다가 화자는 남주(Hero)가 아니라 여주(Heroine)가 되고자 한다. 물음표가 천만 개로 불어나도 모자랄 판이다.

꽃이 되거나 별이 되거나 사라지거나
화자의 내레이션은 그리스 해변을 배경으로 몇 차례 더 이어진다. 너무 많은 주인공들이 신화 속에서 경쟁하던 그곳에서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 또는 어지간히 어리석은 인간조차도 상상 못 할 죄를 하나 일단 저지르면 될 일이었다. 이어서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면 죽어서 꽃이나 별자리가 되어 영원한 주인공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인간1’에 불과한 우리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선 새로운 신화를 쓰거나 전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의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땅과 바다의 신이 격노할 잘못을 하지 않아도 적잖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가 주인공이라서, 주인공으로 태어났는데 주인공이 되지 못해서, 아니면 내가 원하고 세상이 원하는 주인공 노릇을 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아서. 앱을 통해 다비드상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끼워 넣다가, 화자는 차라리 얼굴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고백한다. 다비드상 같은 고전적 조형물마저 수많은 셀카 효과 옵션 중 하나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넉넉해 보이지 않는다. 화면에서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죽지 않아도 주인공의 자리에서 물러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붙드는 동시에 우리가 붙들어 매는 화면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어쩌면 꽃이 되고 별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Jeon Soyoung,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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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rgocollective.com/jeonsoyoung/Heroine-M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