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ting frame{petting frame(petting frame)}]
-전소영


[petting frame{petting frame(petting frame)}]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다. 그 대상의 다양한 성격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 그 대상은 실존하는 대상일 수도 있지만 2D일 수도 있고, 3D도 2D도 아닌 대상일 수도 있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덕질은 신체 없는 허구의 이미지를 쫓는 행동’이고 덕질의 대상은 ‘컨셉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와 빌려온 몸인 실재가 뒤섞’인 존재다. 어쨌든 이 대상을 너무 아낀 나머지 바라보기만 할지, 아낌없이 쓰다듬을지, 대상의 존재 형태와 무관하게 이러한 동작이 이루어진다. 또한 이 대상에게 이리저리 재지 않고 무한한 사랑을 무조건 내어줄 수도 있고, 가능한 한 많이 추측하고 재단한 뒤에 마음의 일정 공간을 내어주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모든 것이 뒤섞이어 ‘도대체 어떻게 좋아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한마디로 답할 수 없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임유정 작가의 ‘What is your favorite thing? (VIDEO_25’22”_2019)’은 ‘무엇을’ 묻고 있지만 사실상 작업 내 인터뷰이들은 ‘어떻게’를 주로 이야기한다.

임유정의 ‘petting frame’은 위에서 예를 든 애호의 방식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 다른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쨌든 이들은 일정한 프레임 안에서 자신의 애정과 애호를 굴리고 살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최애를 향한’ 애정은 불어나기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그라들 때도 있다. (혹은 의식적으로 삭히기도 한다) ‘최애를 향한’ 애정 이전에 ‘최애’의 탄생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펑! 하고 요술처럼 나타나는 최애가 있는 반면, 그냥 지나가는 길가의 잡초의 새싹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아무도 모르는 새 쑥쑥 자라 어느새 마음속에서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는 최애도 있다. 새까만 스팽클을 쓰다듬으니 얼굴을 드러내는 임유정의 세 가지 쿠션(‘cushion pet’, 각각 _jangdonggun, _plants, _walwal, 스팽클 쿠션_400x400mm_2019)의 반전처럼 최애는 예상치 못한 곳에 숨어있다가 계획적으로 나타난다.

최애를 ‘덕질‘하는 프레임 구성의 출처는 따지자면 끝도 없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장담할 수만은 없다. 공기처럼 떠돌아다니는 주변의 다른 프레임을 보고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많은 것을 학습하게 된다. 임유정 작가는 자전적인 이야기 ‘TO ALL THE BEINGS I’VE LOVED BEFORE’ (VIDEO_08’39”_2019)에서 친구들이 댄스그룹을 좋아할 때 혼자 발라드 가수 조성모를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전에 이미 친구와 같은 멤버를 좋아할 순 없어서 다른 멤버를 최애 삼으며 또래 집단에 휘말리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가수 이적을 좋아하면서 또래와는 다른 취향을 가진 자신의 모습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 프레임이 흔들릴 수 있는 원인은 또래 집단 같은 소소한 규모의 집단뿐만이 아니다. 국가 또한 이를 조장한다. 임유정의 지적대로 2002년 월드컵 시즌, 공중파에서는 선수들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계속 ‘리와인드’ 한다. 그리고 10대들의 프레임 안에서 이들은 ‘동료’를 넘어선 ‘연인’이 되어 아이돌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팬픽’ 시장에 루키로 떠오른다. 선수 당사자들도, 애국심을 조장하느라 바빴던 국가와 공영방송사도 상상하지 못했던 프레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라운드 위에서 흘리는 땀은 다르게 각색된다. 또 그 각색이 새로움 프레임을 또 만들어내며 애국심과는 다소 무관한 순환이 이루어진다. 어쨌든 그곳에 사랑은 존재하니 정치적 의도에서 완전히 엇나가진 않은 셈이다.

‘keep petting’ (판화지에 실크스크린, 트레이싱지_247x189mm_2019)은 쓰다듬는 손과 그 사람의 그림자에 드리워지지 않는 밝은 화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시상에서 ‘keeping petting’과 마주하는 대형 스크린 ‘petting, patting’ (single channel video_04’00”_2019)에서 사람들은 식물을 닦아내고, 김치를 버무리고, 강아지를 쓰다듬고, 음향기기를 매만지고, 아이폰을 터치한다. 이는 모두 피부와 닿는 ‘접촉’ 행위의 변주다. 해가 되는 것들을 닦아내고, 좋은 것들을 함께 뒤섞이고, 온기를 전달하고, 가치를 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행위 자체를 자신 또한 즐긴다. 마지막 아이폰 화면 속에 ‘2048’ 게임이 그렇다. 2 또는 4가 랜덤으로 나오는 숫자 블록을 같은 것끼리 더해 2의 배수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이 게임은 2의 10의 배수인 2048까지 깨면 다음 목표인 4096이 목표로 뜬다. 불어나는 덕질은 프레임 밖으로 범람하기 직전까지 확대된다. 동시에 도무지 합칠 숫자가 없어 끝나버리는 게임처럼 어느 날 갑자기 최애와 단단했던 프레임 모두 지난날의 기록으로 남아버린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좋아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프레임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도대체 어떻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다. 질문의 프레임을 한 번 더 씌워, 징그럽게 ‘도대체 어떻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냐?’라는 질문 역시 유효하다. 프레임 안에 최애가 있기도 하지만 프레임 자체가 너무나 소중해서 그 프레임을 사랑하고 보존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덕력’도 있다. 임유정은 이렇게 이미 프레임에 견고하게 갇혀버린 프레임부터 가벼운 프레임까지, 이들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물어보는 동시에 그만의 방식대로 대답한다. 화면 속 왈왈이는 크게 짖지 않는다. 스팽클 뒤에 숨어있는 전성기 시절의 장동건은 좋은 시절을 보여주고, 식물은 늘 그 모습 그대로 자리하며, 또 한 번 등장하는 왈왈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단단한 재료 위에 보드라운 패브릭으로 덧씌워진 종을 알 수 없는 두 마리의 펫(‘pet1’, 털천, 바퀴, 아이소핑크, 목재_730x990x230mm_2019 / ‘pet2’, 털천, 바퀴, 아이소핑크, 목재_460x510x240mm_2019)은 수많은 최애들처럼 ‘여러분 사랑해요’라 말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전시장을 지키고 있다.

글. 전소영 /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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