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주연
2020.09.05 - 2020.09.20
중간지점
고현정, 김지용, 문현지, 박계희, 방재현, 이민선, 임유정
기획 및 주최 : 중간지점
협력 기획 : 이문석
︎전시 정보
사진: 고정균
중간지점 제공
2020.09.05 - 2020.09.20
중간지점
고현정, 김지용, 문현지, 박계희, 방재현, 이민선, 임유정
기획 및 주최 : 중간지점
협력 기획 : 이문석
︎전시 정보
사진: 고정균
중간지점 제공
사진: 고정균
중간지점 제공
중간지점 제공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
두 팔을 벌릴 정도의 거리는 좁은가.
‘나’와 ‘자아’를 의미하는 글자 ‘我(아)’는 본래 “창으로 상대를 해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먼 옛날, ‘나’란 다른 이의 접근을 불허하는 적의의 면적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로 꽉 채우는 공간, 두 팔 벌릴 정도의 면적이란, 창을 휘둘러서라도 확보하고 싶은 자기 서사의 너비이기도 하다.
‘중간지점’은 전시 《단독 주연》에 참여하는 작가의 수만큼 공간을 나눈다. 참여 작가들은 각자에게 할애된 공간을 자신이 선택한 색상의 벽면과 장막으로 둘러싼다. 작가들은 그 공간 안에 자기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가 재현된 작업을 넣어둔다. 쉬폰 재질의 커튼을 걷어내고 그 너머에 있는 재현된 신체와 마주할 때, 관객들은 무대 장막 너머의 등장인물을 연상할 수 있다.
관객과 작품은 약 1.2~1.5 미터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다. 두 팔을 벌린 정도의 길이를 가진 이 공간의 면적은 한 사람으로 가득 차는 너비라는 점에서, 단 한 사람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서사를 올릴 최소한의 단위다. 이 면적 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체를 마주한다.
박계희 작가는 70여 년의 세월 동안 근현대사의 반사체로 기능해온 자신의 모습을 따듯한 온도를 가진 색감으로 그려낸다. 문현지 작가의 <환>은 스무 해 넘도록 함께 산 할머니의 귀와 자신의 귀를 비단 조각으로 만들어 전시장 천장에 매달아둔다. 방재현 작가는 가상으로 성형한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성형외과 현장에서 사용하는 차트와 함께 걸어두었다. 고현정 작가는 누군가의 용모를 그린 몇 점의 그림 주위에 피부 빛으로 채색한 종이로 둘러싸 신체의 표면과 매체의 표면으로 벽면을 메운다. <신체검사>를 그린 김지용 작가는 유년시절의 사진을 다시 경계선이 뿌연 유화로 옮겨냈다. 이민선 작가는 <29일의 금요일>에서 작가 이민선과 흰 천을 뒤집어써 유령으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영상작업과, 작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을 기록한 일기장을 마련하였다. 임유정 작가는 반짝이는 아크릴 소재의 조형물 사이로 오늘날 가장 광범위한 자기 재현 방식인 '셀카'를 영상의 소재로 다룬다.
두 팔 사이의 공간에 작가의 신체가 하나둘 놓인다. 전시는 자화상과 같이 자신을 재현해온 작가들에게 각각 장막이 둘러쳐진 한 칸의 공간을 나누어준다. 작가 중 어느 누구도 클로즈업 된 안면을 그리는 방식으로 자화상을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각각 자기 신체를 재현해왔다. 그리고 이때 자기 재현은 자화상이 제작되는 공간감을 경험할만한 공간에 위치해있다. 떠올려보면, 자화상은 그리는 이(재현 주체)와 그려지는 이(재현 대상)과 작품(재현물) 세 꼭짓점이 들어설만한 정도의 공간에서 벌어진다. 반 평 남짓한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감각하고 바로 제작할 수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이 좁은 면적 안으로 들어서게 한다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인지하는 근거리의 동선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이고, 재현되는 프로세스의 거리감을 느끼는 일이고, 세 꼭짓점의 표면을 받아들이는 상황인 것이다. 자화상은 자문자답의 면적을 필요로 한다. 그건 그 자문자답의 거리가 스스로 창을 쥐고 다른 이가 침범할 수 없도록 지키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안전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는 이 거리 안쪽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좁은 공간구성 안에 들어설 때, 관객은 자신의 형상을 그리는 자화상 프로세스의 면적, 즉 자기 서사의 거리로 보다 이끌리게 된다. 자화상이란 바로 이 긴장감에 대한 재현이다. 이 전시는 위태로운 면적에 대한 재현이다. 우리가 이 안에서 마주하게 될 작품은 두 팔을 벌리면 닿을 거리 안쪽에서 벌어지는 1인극이다.
두 팔을 벌릴 정도의 거리는 당연히 좁다. 앞서 설명한 ‘我(아)’에 덧붙여 한 글자 더 말해보겠다. ‘나’라는 의미를 가진 또 다른 글자 ‘吾(오)’는 ‘우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을 나누고 식사를 하는 ‘입(口)’의 유무다. 전시가 마무리될 즈음, 작가들은 이날 모여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 사이의 장막을 걷고 음식을 나누고 말을 나눈다. 단독 주연의 장소, 자문자답의 면적, 자기 서사의 거리, 두 팔로 벌린 자리가 다시 그 의미의 범주를 넓히기 위한 자리, 우리가 맞이할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곳,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는 이야기가 허용되고 확산되는 너비다. 그러므로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는 좁지 않다.
이문석(독립 큐레이터)
두 팔을 벌릴 정도의 거리는 좁은가.
‘나’와 ‘자아’를 의미하는 글자 ‘我(아)’는 본래 “창으로 상대를 해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에 대하여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먼 옛날, ‘나’란 다른 이의 접근을 불허하는 적의의 면적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나’로 꽉 채우는 공간, 두 팔 벌릴 정도의 면적이란, 창을 휘둘러서라도 확보하고 싶은 자기 서사의 너비이기도 하다.
‘중간지점’은 전시 《단독 주연》에 참여하는 작가의 수만큼 공간을 나눈다. 참여 작가들은 각자에게 할애된 공간을 자신이 선택한 색상의 벽면과 장막으로 둘러싼다. 작가들은 그 공간 안에 자기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가 재현된 작업을 넣어둔다. 쉬폰 재질의 커튼을 걷어내고 그 너머에 있는 재현된 신체와 마주할 때, 관객들은 무대 장막 너머의 등장인물을 연상할 수 있다.
관객과 작품은 약 1.2~1.5 미터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다. 두 팔을 벌린 정도의 길이를 가진 이 공간의 면적은 한 사람으로 가득 차는 너비라는 점에서, 단 한 사람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서사를 올릴 최소한의 단위다. 이 면적 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신체를 마주한다.
박계희 작가는 70여 년의 세월 동안 근현대사의 반사체로 기능해온 자신의 모습을 따듯한 온도를 가진 색감으로 그려낸다. 문현지 작가의 <환>은 스무 해 넘도록 함께 산 할머니의 귀와 자신의 귀를 비단 조각으로 만들어 전시장 천장에 매달아둔다. 방재현 작가는 가상으로 성형한 자신의 얼굴 이미지를 성형외과 현장에서 사용하는 차트와 함께 걸어두었다. 고현정 작가는 누군가의 용모를 그린 몇 점의 그림 주위에 피부 빛으로 채색한 종이로 둘러싸 신체의 표면과 매체의 표면으로 벽면을 메운다. <신체검사>를 그린 김지용 작가는 유년시절의 사진을 다시 경계선이 뿌연 유화로 옮겨냈다. 이민선 작가는 <29일의 금요일>에서 작가 이민선과 흰 천을 뒤집어써 유령으로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영상작업과, 작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을 기록한 일기장을 마련하였다. 임유정 작가는 반짝이는 아크릴 소재의 조형물 사이로 오늘날 가장 광범위한 자기 재현 방식인 '셀카'를 영상의 소재로 다룬다.
두 팔 사이의 공간에 작가의 신체가 하나둘 놓인다. 전시는 자화상과 같이 자신을 재현해온 작가들에게 각각 장막이 둘러쳐진 한 칸의 공간을 나누어준다. 작가 중 어느 누구도 클로즈업 된 안면을 그리는 방식으로 자화상을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각각 자기 신체를 재현해왔다. 그리고 이때 자기 재현은 자화상이 제작되는 공간감을 경험할만한 공간에 위치해있다. 떠올려보면, 자화상은 그리는 이(재현 주체)와 그려지는 이(재현 대상)과 작품(재현물) 세 꼭짓점이 들어설만한 정도의 공간에서 벌어진다. 반 평 남짓한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감각하고 바로 제작할 수 있다. 관객으로 하여금 이 좁은 면적 안으로 들어서게 한다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인지하는 근거리의 동선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이고, 재현되는 프로세스의 거리감을 느끼는 일이고, 세 꼭짓점의 표면을 받아들이는 상황인 것이다. 자화상은 자문자답의 면적을 필요로 한다. 그건 그 자문자답의 거리가 스스로 창을 쥐고 다른 이가 침범할 수 없도록 지키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안전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는 이 거리 안쪽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좁은 공간구성 안에 들어설 때, 관객은 자신의 형상을 그리는 자화상 프로세스의 면적, 즉 자기 서사의 거리로 보다 이끌리게 된다. 자화상이란 바로 이 긴장감에 대한 재현이다. 이 전시는 위태로운 면적에 대한 재현이다. 우리가 이 안에서 마주하게 될 작품은 두 팔을 벌리면 닿을 거리 안쪽에서 벌어지는 1인극이다.
두 팔을 벌릴 정도의 거리는 당연히 좁다. 앞서 설명한 ‘我(아)’에 덧붙여 한 글자 더 말해보겠다. ‘나’라는 의미를 가진 또 다른 글자 ‘吾(오)’는 ‘우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을 나누고 식사를 하는 ‘입(口)’의 유무다. 전시가 마무리될 즈음, 작가들은 이날 모여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 사이의 장막을 걷고 음식을 나누고 말을 나눈다. 단독 주연의 장소, 자문자답의 면적, 자기 서사의 거리, 두 팔로 벌린 자리가 다시 그 의미의 범주를 넓히기 위한 자리, 우리가 맞이할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이다. 그러므로 여기 이곳,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는 이야기가 허용되고 확산되는 너비다. 그러므로 두 팔로 벌려놓은 자리는 좁지 않다.
이문석(독립 큐레이터)